김명지 | 뉴로만
김명지 | 뉴로만
#기억 #상실
2024년 3월, 경북 청송의 고향집이 산불로 전소되었습니다. 불탄 집의 사진을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받았고, 낯선 도시로 들어가는 그 길 위에서 저는 울 수 없었습니다. 그 집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타이타닉을 보던 추석의 밤, 아궁이 불 앞에서 이불을 걷어차던 감각, 장롱 속 먼지 냄새 같은 기억의 집합이었습니다. 불은 그 모든 시간을 태웠고, 사라졌다는 감각보다도 남아 있다는 감정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이 작품은 불이 지나간 자리에서 비로소 껴안을 수 있게 된 감정과 기억의 물성에 대한 기록입니다. 직접 종이를 오리고 불로 태운 뒤 스캔하여 마른 불의 흔적을 연출했고, 그 위에 얹힌 글자들이 서로를 껴안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상하 구조의 마주보는 배치를 택했습니다. 껴안기 위해서는 먼저 마주봐야 한다고 믿었고, 마지막으로 종이를 접어 물리적으로도 감정이 포개지도록 구성했습니다.
자연재해는 종종 빠르게 잊히지만, 저는 디자인을 통해 고향의 시간과 감정을 붙들고자 했습니다. 저에게 디자인은 사라진 것을 기억 속에 새기고, 사랑하는 장소를 나만의 방식으로 지켜내는 일입니다.
청송이라는 지역은 저에게 기억의 배경이자, 감각을 형성한 장소였습니다. 제가 선택하는 질감, 색감, 구조에는 그곳의 기후, 시간의 속도, 건물의 재료 같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습니다. 아궁이의 열기, 서까래의 나뭇결, 방 안의 습도처럼, 그 지역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촉각적 기억들이 내 작업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단순히 지역에서 작업한다는 조건이 아니라, 지역이라는 환경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태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디자인의 역할을 스스로 물어보는 사람, 그리고 그런 질문을 자기만의 언어와 형태로 풀어낼 줄 아는 사람과 서로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디자인은 무엇을 남기는가”라는 질문에 더 자주, 더 가까이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작업한다는 건 단지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라지는 것을 오래 바라보고, 그것을 붙드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경험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단지 개인적인 애도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기억을 물질화하고 감각화하는 시도로 이어졌으며, 작은 마을에서 디자인을 한다는 선택이 결국 내 시선과 표현 방식을 결정지었습니다.